관리 메뉴

새로운 시작, GuyV's lIfe sTyle.

소주 한잔 본문

유용주

소주 한잔

가이브 2008.07.21 00:14
소주 한잔
유용주 (시인)

  마른장마 속 여름 안개가 첩첩산중이다. 인생이 쓰면 소주가 달다고 했지만 서산 동부시장 잔술집 ‘바다 옆에’는 새벽부터 부지런한 발걸음에 치여 문턱이 두어 치 낮아졌다. 청과물은 새콤달콤, 어물전은 펄떡펄떡, 육고기는 울끈불끈, 떡집·옷가게·싸전·솜틀집·기름집·우럭포·광천 새우젓갈 모두 왁자지껄 야단법석이다. 마수걸이를 했다 한 잔, 손님하고 싸웠다 두 잔, 배달 나갔다 와서 석 잔, 계산 틀렸다 한 병, 해장하자 두 병. 어허, 이러다가 마애삼존불 위에 떠 있던 해가 간월도를 건너 안면도를 지나 옥돌 유명한 파도리 서쪽 바다로 휘청 넘어가겠구나. 여기까지는 서해안 지방의 소주 맑을린이 함께한다. 저 가없는 바다 위에 비늘처럼 반짝이는 소주잔들. 땀 흘린 만큼 몸을 부려 생활을 이끄는 우리네 건강한 이웃들.

모두들 어렵다고 한다. 기름값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물가는 덩달아 춤추더니 기업 투자와 체감경기가 십여 년 전 외환위기 이후 가장 힘든 상황에 처해 있다고 아우성이다. 우리 흰옷 입은 백성들은 유사 이래 콩 한 쪽도 나누어 먹고 살아왔다. 소주 서너 짝이면 온 세상이 신명난 잔치판이었다. 한강이 발원하는 강원도는 거울만큼 깨끗한 처음처럼이 곤드레나물밥과 메밀국수와 어울렸고, 강물이 양수리를 거쳐 임진강과 만나는 지점까지는 참이슬이 뭇 생명을 살렸으니 참이슬은 오천만 겨레의 불로초다. 천년 세월을 사는 백학은 청풍명월 정이품송 단재의 기상이 늠름했으며, 낙동강 중상류는 큰스님 얼굴만큼이나 푸근한 금복주가 지켰으니 칠백 리 유장한 물줄기는 흘러흘러 만금을 주고도 못 사는 너른 백사장에 탁 트인 바다를 선물한다. 시원소주는 조선의 바다 빛이다.

물과 불이 만나 퍼올린 소주는 애초부터 계급이 없었다. 재상도 사돈도 나그네도 주인도 넥타이도 막노동도 붓장사도 춤꾼도 땜쟁이도 농사꾼도 그물코도 훈장도 노숙자도 철거민도 장애우도 차별하지 않았다. 저 윤이상과 박경리를 배출한 통영과 마산 앞바다는 시베리아 눈 덮인 자작나무 길을 연상시키는 무학이 함께했으며, 녹두장군이 고부에서 형형한 눈빛을 밝힐 때부터 이 땅의 심장은 보배가 멋과 맛을 살렸으며, 호남이 없으면 조선도 없다고 일갈하신 충무공 얼이 서린 남도는 지리산·무등산·월출산 늘푸른 잎새주가 끝까지 나라를 구해 약속을 지켰다.

소주만큼 맑고 깨끗한 영혼을 본 적이 있는가. 소주만큼 크고 고결한 정신을 만나본 적 있는가. 정신은 높되 몸은 한없이 낮은 곳으로 흘러가나니, 한반도 자존심 제주에는 한라산과 백록담이 있어 대양을 항해할 때 등대로 삼았다. 삶의 푯대로 삼았다.

옛날 돌궐제국 톤유쿠크 장군 묘비에는 이런 글이 씌어 있다고 한다. ‘성을 쌓는 자는 망할 것이요, 길을 뚫는 자만이 흥할 것이다’. 그렇다! 소주는 우리의 혈관을 한껏 열어 소통의 축제 마당으로 얼싸안고 데려간다. 찜과 쌈과 탕과 찌개와 볶음과 스스럼없이 어울린다. 자장면, 부침개, 빈대떡, 돼지족발, 삼겹살, 얼큰 라면 심지어 소금 부스러기, 간장 종지와도 흉금 털어놓고 같이 앉는다.

바람의 빛깔을 타고 솟구쳐 올라온 투명하고 간결한 열정, 한도 끝도 없는 은빛 물주름의 여백, 짧은 휴가철에 만나는 소주 한잔의 힘은 대한민국의 원동력이다.

(http://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Total_ID=3220588)

0 Comments
댓글쓰기 폼